젖어도 된다고
1. 정말 단 한번도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적이 없었다.
그땐 이해했었다.
의도를 알 것 같기도 했고.
'비가 오면 좀 젖어도 된다.' 라는 그 말에
예기치 않은 비에 우산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,
나는 비에 젖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.
아빠, 우산이 나를 약하게 만들진 않았을 거에요.
오히려 마중 나온 우산이 하나쯤 있었다면 나는
그 순간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기억했을거야.
2. 빗물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는
뭐랄까.. 좀 다르다.
그래서 비가오면 잠결에도 알 수 있었다.
조그만한 아이가
베란다 창문을 열고 무릎을 가슴에 안고
비를 보던 습관이 오늘도 나를 베란다로 이끌었다.
웅덩이의 파문, 내 손에 튀는 빗물
'젖어도 좋다.'
3. 열살 무렵 첫 장화가 생겼을 때
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.
연석을 따라 콸콸 흘러내리던 물줄기에 일부러 발을 집어넣어도
하나도 젖지 않을 수 있다는게 신기하고 좋아서 혼자 연석을 따라 한참 걸었다.
그래서 회사 화장실에서 울고 싶던 날
감자가 신을 첫 노란색 장화를 주문했다.
첨벙거리며 한참 걷던 그날의 기분을 감자를 통해서 느끼고 싶었겠지.
'아빠가 같이 있을땐 젖어도 돼 뛰어봐' 하며
비가 오던 주말 세살 된 감자랑 뛰어 놀았다.
4. 이제와서 생각해보니
비에 젖는게 싫은게 아니었던 것 같아.
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을 기다리는 동안
나 '혼자' 우산없이 서있던게 싫었던거지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