마음 이야기

젖어도 된다고

chorok_be 2023. 5. 30. 13:53

 

1.  정말 단 한번도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적이 없었다.

    그땐 이해했었다.

    의도를 알 것 같기도 했고.

 

    '비가 오면 좀 젖어도 된다.' 라는 그 말에

    예기치 않은 비에 우산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,

    나는 비에 젖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.

 

   아빠, 우산이 나를 약하게 만들진 않았을 거에요. 

   오히려 마중 나온 우산이 하나쯤 있었다면 나는 

   그 순간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기억했을거야.

   

2. 빗물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는

    뭐랄까.. 좀 다르다.

    그래서 비가오면 잠결에도 알 수 있었다.

    

     조그만한 아이가 

     베란다 창문을 열고 무릎을 가슴에 안고

     비를 보던 습관이 오늘도 나를 베란다로 이끌었다.

 

     웅덩이의 파문, 내 손에 튀는 빗물

     '젖어도 좋다.'

 

3. 열살 무렵 첫 장화가 생겼을 때

   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. 

    연석을 따라 콸콸 흘러내리던 물줄기에 일부러 발을 집어넣어도

    하나도 젖지 않을 수 있다는게 신기하고 좋아서 혼자 연석을 따라 한참 걸었다.

 

    그래서 회사 화장실에서 울고 싶던 날

    감자가 신을 첫 노란색 장화를 주문했다.

  

    첨벙거리며 한참 걷던 그날의 기분을 감자를 통해서 느끼고 싶었겠지.

   

   '아빠가 같이 있을땐 젖어도 돼 뛰어봐' 하며

    비가 오던 주말 세살 된 감자랑 뛰어 놀았다.

 

4. 이제와서 생각해보니

     비에 젖는게 싫은게 아니었던 것 같아.

     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을 기다리는 동안

     나 '혼자' 우산없이 서있던게 싫었던거지.